하동 정씨 상세 정리, 역사, 항렬표, 주요 파벌 분석

하동 정씨 상세 정리, 역사, 항렬표, 주요 파벌 분석

하동 정씨의 개요와 역사적 배경

하동 정씨는 경상남도 하동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입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국에 약 4만 9,440가구에 15만 8,3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하동 정씨는 본관은 같지만 시조를 달리하는 세 가지 계통으로 분류됩니다. 이들은 밀직공 국룡파(정도정 계열), 정승공 응파(정응 계열), 지부사공 손위파(정손위 계열)입니다.

하동 정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자로 총 312명을 배출하는 등 학문과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동 정씨의 역사는 신라 말기부터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한국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밀직공 국룡파: 정도정 계열의 역사와 특징

밀직공 국룡파는 신라 말기 하동 지방의 호족이었던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합니다. 정도정은 신라 진성왕 때 하동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923년(경명왕 7)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했을 때 하동호장(河東戶長)이 되어 향병(鄕兵)을 단련하여 하동성(河東城)을 지켰습니다. 그 후 고려로 통합될 때는 경순왕을 개성까지 호위하여 내의성상시(內議省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정도정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정확한 기록이 없어,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밀직공 국룡파는 정도정의 4세인 정연서(鄭延敍)가 한림학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정국룡(鄭國龍)이 문과에 급제해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에 올랐습니다.

이 계열에서는 특히 10세 정인지(鄭麟趾)와 12세 정여창(鄭汝昌)이 유명합니다. 정인지는 1414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425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1427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수재였습니다. 1453년 계유정난에서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하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 세조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밀직공 국룡파는 다시 산원공파(散員公派), 흥의공파(興義公派), 문성공파(文成公派) 등으로 분파되었으며, 전체 하동 정씨의 약 60%가 이 파에 속합니다.

하동 정씨 항렬표와 그 의미

세수 문성공파
(밀직공 국룡파)
문절공파
(정승공 응파)
손위계
(지부사공 손위파)
응계
(정승공 응파)
도정계
(밀직공 국룡파)
24세       海(해) 植(식), 采(채)
25세 ○鉉(현) 鉉(현) 文(문) 來(래), 模(모) 炳(병), 燦(찬)
26세 淳(순)○ 淳(순) 兢(긍) 煥(환), 顯(현) 均(균), 基(기)
27세 ○采(채) 采(채) 善(선) 基(기), 奎(규) 鎭(진), 會(회)
28세 燦(찬)○ 燦(찬) 雨(우) 鎭(진), 欽(흠) 洙(수), 永(영)
29세 ○基(기) 基(基) 相(상) 淵(연), 淳(순) 炳(병), 集(집)
30세 會(회)○ 會(會) 薰(훈) 東(동), 相(상) 燮(섭)
31세 ○永(영) 永(永)   爀(혁), 燮(섭) 敎(교), 致(치)
32세 集(집)○ 集(집), 秉(병)      
33세 ○燮(섭) 燮(燮)      
34세 敎(교)○ 敎(敎)      
35세 ○鎬(호) 鎬(鎬)      
36세 泰(태)○ 泰(泰)      
37세 ○柄(병) 根(근), 權(권)      
38세 烱(경)○ 炯(형)      
39세 ○培(배) 圭(규), 坤(곤)      
40세 銖(수)○ 鐘(종)      
41세 ○洙(수) 洙(洙)      
42세 槿(근)○ 槿(근)      
43세   董(동)      
44세   埈(준)      
45세   錫(석)      
46세   漢(한)      
47세   桓(환)      

※ ○표는 항렬자가 이름의 앞 또는 뒤에 올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동 정씨의 항렬표는 가문의 연보와 가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항렬표는 각 세대별로 사용하는 돌림자(通字)를 정해놓은 것으로,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같은 돌림자를 사용합니다. 이를 통해 가문 내에서의 세대 구분과 친족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동 정씨의 항렬표는 각 계파마다 다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밀직공 국룡파의 경우 9세손인 정난(鄭難)의 후손이 산원공파, 정침(鄭{王+冗})의 후손이 흥의공파, 하성부원군 정흥인(鄭興仁)의 아들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이 문성공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각 파마다 고유한 항렬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렬표는 가문의 역사 연구, 문화유산 이해, 후손들에게 성씨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제사나 종친회와 같은 가문 행사에서 세대 간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활용됩니다.

정승공 응파: 정응 계열의 발전과 주요 인물

정승공 응파는 고려 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낸 정응(鄭膺)을 시조로 합니다. 정응은 한때 태자관(太子官)의 첨사(詹事)를 맡기도 했습니다.

정승공 응파는 6세 정희(鄭熙), 7세 정초(鄭招), 8세 정수충(鄭守忠), 9세 정세(鄭稅)로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7세 정초는 세종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계열의 하동 정씨는 조선 전기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들을 배출했습니다. 정승공 응파는 학문과 정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부사공 손위파: 정손위 계열의 특성과 업적

지부사공 손위파는 고려 숙종부터 명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조에 걸쳐 벼슬을 한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합니다. 정손위는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예부사(知禮部事), 응양대장군(膺揚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 등 다양한 고위 직책을 역임하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손위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을 옹립한 육부촌장(六部村長) 중 한 명인 지백호(智佰虎) 감문왕(甘文王, 추봉)의 후손으로, 지백호의 40대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관시조는 정손위로 하여 대수를 세고 있습니다.

정손위의 아들 정세유(鄭世裕)는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습니다. 지부사공 손위파는 예부공파(禮部公派)라고도 불리며, 고려 말 정지상은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강릉대군(뒤에 공민왕)을 시종하고 공민왕 때 판사에 이르렀습니다.

하동 정씨의 지역적 분포와 집성촌

하동 정씨는 본래 경상남도 하동군을 중심으로 세거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습니다. 특히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성평마을은 하동 정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1600년경 처사 정홍장(鄭泓長)의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는 묘하각으로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고 세거함으로써 하동 정씨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

현재 성평마을은 전체 60여 가구 중 하동 정씨와 특수 관계를 맺은 가구가 30여 호에 이릅니다. 또한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에는 현감공파 정진일이 17세기 후반에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현재도 10가구 정도의 하동 정씨가 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전라남도 해남군에는 장령공 정희주의 아들 정의중이 1433년(세종 15)에 경상도 하동에서 영암 모산리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 이후 장령공파 후손인 직장공 정윤이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 입향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동 정씨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의의

하동 정씨는 오랜 역사 동안 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2006년 1월 12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된 하동 동리 방형분 3기와 묘역이 있습니다.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리 산1-6번지에는 정국룡과 그의 둘째 아들 정난연(鄭蘭衍)의 묘가 같은 묘역에서 상하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첫째 아들 정지연의 묘는 그곳으로부터 북쪽으로 80m 떨어진 하동군 적량면 동리 산1-5번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행정복지센터 정원에는 문의현감을 지낸 정진일의 4세손 정재기(鄭在箕) 영세불망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하동 정씨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동 정씨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자로 총 312명을 배출하는 등 학문과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20세기에는 대표적인 한국의 기업가인 고 정주영이 하동 정씨 출신입니다.

하동 정씨의 역사와 전통은 한국의 성씨 문화와 가문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구되고 보존되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하동 정씨는 몇 개의 계통으로 나뉘며, 각각의 시조는 누구인가요?
A. 하동 정씨는 본관은 같지만 시조를 달리하는 세 가지 계통으로 분류됩니다. 이들은 밀직공 국룡파(정도정 계열), 정승공 응파(정응 계열), 지부사공 손위파(정손위 계열)입니다.

Q. 밀직공 국룡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누구이며, 어떤 업적을 남겼나요?
A. 밀직공 국룡파에서는 특히 10세 정인지(鄭麟趾)와 12세 정여창(鄭汝昌)이 유명합니다. 정인지는 계유정난에서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하고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세조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Q. 하동 정씨 항렬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A. 하동 정씨의 항렬표는 각 세대별로 사용하는 돌림자(通字)를 정해놓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가문 내에서의 세대 구분과 친족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가문의 역사 연구, 문화유산 이해, 후손들에게 성씨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Q. 정승공 응파에서 《농사직설》을 편찬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A. 정승공 응파 7세 정초는 세종 때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Q. 하동 정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어디인가요?
A.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성평마을은 하동 정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으로, 1600년경 처사 정홍장(鄭泓長)의 후손들이 세거함으로써 하동 정씨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